전씨는 역사깊은 명문벌족으로 신라, 고려시대를 통틀어 군(君)에 봉해진 사람이 35명, 정승 12명, 판서 43명을 배출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만 57명을 배출했다.
이러한 전씨문중에서 특히 고려개국 삼충공(三忠公)인 전이갑(全以甲), 전락(全樂)등
3형제를 빼놓을수 없다. 이들은 후삼국 통일의 야망을 키우던 왕건이 팔공산 오동숲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사와 일대 접전을 벌이다 적에게
포위를 당하자 전이갑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적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왕건을 탈출시키고 3형제는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 한다.
정선아리랑의 작가 전오륜(全五倫)
고려왕가에 충절을 지킨 고려말 공조판서 전순(全順)
전신(全信) 병부상서에 올랐다.
조선말기의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땅에 최초로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트게한 동학혁명의 지도자이다. 그는 삼충공의 한 사람인 전락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되자 사회개혁을 결심하고 30세때
동학에 입문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가 된다. 그리고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백성의 고통 받자 보다 못해 동학혁명을 일으켜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일깨워준다. 처음에는 계속 승전하여 전주를 점령하고 크게 전세를 떨쳤으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들어오고,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해 일본군도 입국하자 이천, 목천, 공주의 혈전에서 패배하고,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韓信賢)등의 지방민에 의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이러한 동학혁명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중혼은 일제의 암흑기에 이르러 숱한 독립투사를 배출한다.
안창호선생과 신민회를
조직,적극적으로 배일(排日)운동을 벌였던 전덕기와 의병장 전덕원 등이 그들이다.
전영보(全英甫) : 충숙왕 때 원나라가 고려를 그들의 한성으로 만들려는 것을 극력 반대하여 물리친 공으로 1 등공신이
되고, 충숙왕 때 삼사사를 거쳐 수군만호가 되었다. [ 충렬왕 때 낭장을 거쳐 1310년(충선왕2) 대호군이 되었다.
1320년(충숙왕7) 밀직부사, 다음해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 1324년 첨의평리를 역임, 1326년 원나라가 고려 말에 그들의 한 성으로
만들려는 것을 김이(金怡), 전언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물리침으 로써 1등 공신에 올랐다. 1321년부터 충숙왕을 원나라에서 시종했던 공으로
1327년 찬성사로서 1등 공신이 되었고, 1339년(충숙왕 복위8) 삼사사, 1341년 순군만호가 되었다. ]
전이도(全以道) : 1362 년(공민왕 11) 홍건적의 침입 때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고 안동도
병마사에 이르렀다. [ 공민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머물 때 시종,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귀국하여 낭장이 되고, 다음해 1등공신에
올라 의성찬사가 되었다. 뒤에 예부시랑으로 경사도 진제사를 거쳐 판전농시사를 역임하고, 1362년(공민왕11) 홍건적 침입때 경성수복에 공을
세워 다음해 2등공신에 안동도 병마사가 되었다. ]
전공취(全公就) 고려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전덕기(全德基) 독립운동가.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 목사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를
조직, 애국청년을 모아 민족운동을 지도하고, 1906년(광무10) 이준(李儁)·박정동(朴晶東)과 함께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창설, 국권
회복(國權回復)을 위해 노력했다. 이듬해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양기탁(梁起鐸)·이갑(李甲)·윤치호(尹致昊)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그 중앙위원(中央委員)이 되어 전국적인 배일(排日)운동을 벌였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한때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독립운동을 계속 하던 중 서울에서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전덕명(全德明) ?-1926 독립운동가. 평북 용천(龍川)출신. 한일합방 후에 종형(從兄) 덕원(德元)과 남만주로
망명, 독립단(獨立團)에 가입한 뒤 남만주의 각 단체 통일후원대장(各團體統一後隊長)이 되었다. 1926년 참의부 참의장(參議府參議長)
최석순(崔碩淳) 등과 고마령(古馬嶺)에서 군사회의를 하던 중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고 전사했다. 전덕원(全德元)
1870(고종 7)~? 독립운동가. 호는 호은(湖隱)·정송(挺松). 평북 용천(龍川) 출신.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으로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상경, 각국 공사(公使)에게 일본 침략을 규탄하는 격문(檄文)을 보내고 의병을 일으켰다가 이듬해 황주(黃州)에
귀양갔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풀려나와 1912년 만주로 망명, 1919년 유하현(柳河縣)에서 동지들과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
재무부장이 되었다. 이 해 부하를 이끌고 입국, 5천 7백원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고, 이듬해 다시 국내에 들어와 30여만원의 거액을 모금했다.
1922년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체인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자 다시 재무부장에 취임, 이듬해 환인현(桓仁縣)으로 이주하여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고 군무부장(軍務部長)이 되어 8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귀국, 신의주(新義州)·성진(城津)·청진(淸津) 등의 주재소(駐在所)·세관 관공서를
파괴하여 임가구(林家溝)에서 체포되었다. 평양에서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출옥 후에는 이병기(李炳基)·홍주(洪疇)·박승연(朴勝衍) 등과
독립운동사를 편찬하며 계속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박상문(朴尙文)의 밀고에 피체,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전보인(全輔仁) ?~1019(현종10) 고려의 문신. 989년(성종 8) 나주목
경학박사(羅州牧經學博士)로서 후학(後學) 지도에 힘써 포상(褒賞)을 받았다.
전봉학(全奉學) ?~1905(광무 9)
조선의 순국지사. 육군 평양대(平壤隊)의 병졸로 있다가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동료 윤두병(尹斗炳)·주병준(朱秉濬)
등과 함께 대궐 문 앞에서 자결, 순국했다.
전 선(全 ○) 신라(新羅) 내물왕(奈物王) 때 백제로부터 공주(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신라에 들어와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책록(策錄)되었으며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전법 판서(典法判書) 등을 역임하고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
전수송(全守松) 고려 때 상서(尙書)를 지냈다.
전 숙(全 淑) 고려 때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전승택(全承澤) 고려 때
승상(丞相)에 이르렀다.
전 언(全 彦) 고려의 공신. 1324년(충숙왕11) 밀직 부사(密直副使)가 되고
감천군(甘泉君)에 봉해졌다. 1326년 원나라가 고려를 통합하여 그들의 성(省)으로 만들려는 것을 찬성사(贊成事)
김이(金怡)·전영보(全永輔)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물리침으로써 1등 공신에 올랐고, 1331년(충혜왕 1) 찬성사가 되었다.
전영보(全英甫)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낭장(郞將)을 거쳐 대호군(大護軍)·밀직부사(密直府使)·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으며 1324년(충숙왕11)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1326년(충숙왕13) 원(元)나라가 고려(高麗)를 그들의 한 성(省)으로
만들려하자 김이(金怡)·전언(全彦) 등과 함께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물리쳐 1등 공신(功臣)에 올랐고, 1321년(충숙왕 8)부터
충숙왕(忠肅王)을 원(元)나라에서 시종했던 공으로 1327년(충숙왕14) 찬성사(贊成事)로서 1등 공신(功臣)이 되었다. 그후 1339년(충숙왕
복위 8) 삼사사(三司使), 1341년(충혜왕 2) 순군 만호(巡軍萬戶)에 이르렀다.
전예순(全禮淳) 1896(건양
1)~1928 독립운동가. 평남 안주(安州) 출신. 3·1운동 때 안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연락 임무를 담당하다가 신의주에서 다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1927년에 출옥했다.
전오륜(全五倫) 고려 문신(文臣)으로 호는 채미헌(採薇軒), 1391년(공양왕 3)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으나 조선 태조에 본향안치(本鄕安置)의
처벌을 받았다. 후에 석방되어 서운산(瑞雲山)에 은거(隱居)했다. 안의(安義)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전우화(全遇和)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
전응견(全應堅)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지냈다.
전 의(全 懿) 고려 때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전의갑(全義甲)
고려 개국(高麗開國) 초(初)에 대장군(大將軍)을 지낼 때 형(兄) 이갑(以甲)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전이갑(全以甲) 자(字)는 자경(子經), 호(號)는 도원(桃源),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을 역임하였으며 고려 개국(開國) 때 태사공(太師公)으로 공(功)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전이도(全以道) 고려의 문신. 공민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머물 때 시종(侍從), 1351년 공민왕의 즉위로 귀국하여
낭장(郞將)이 되고, 이듬해 1등 공신에 올라 의성창사(義城倉使)가 되었다. 후에 예부 시랑(禮部侍良)으로 경상도 진제사(慶尙道賑濟使)를 거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역임하고, 1362년(공민왕11)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경성(京城:개성) 수복에 공을 세워 이듬해 2등 공신에
안동도 병마사(安東道兵馬使)가 되었다.
전인학(全仁學) 1896(건양 1)~? 독립운동가. 일명 일(一).
함북 길주(吉州) 출신. 한일합방 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이정국(李政國)·신대용(申大勇) 등과 만주·시베리아 각지를 순회, 독립운동을
벌였고, 1919년 3·1운동 때 시베리아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인신보(韓人申報)」가 발간되자 총리 겸 기자로
있으면서 항일기사를 썼으며, 1920년 대한민국의회(大韓民國議會)가 발족할 때 선전부장이 되어 러시아 혁명군 사령부 연해주(沿海州) 선전국장
포리소와 협의, 일본군대에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전단(傳單)을 돌리다 체포되었다. 4년형의 선고를 받고 청진(淸津)에서 복역중 감옥에서 비밀결사
적유 의용단(赤油義勇團)을 조직, 1923년 탈옥을 감행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5년간 서울에서 복역했다. 1926년 만기 출옥, 북간도
혼춘(琿春)으로 돌아가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전장이(全藏二) 고려 때 상서(尙書)를 지냈다.
전존걸(全存傑) ?~1193(명종23) 고려의 문신. 1193년(명종23)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장군
이지순(李至純)·이공정(李公靖)·김척후(金陟侯)·김경부(金慶夫)·노식(盧植) 등을 거느리고 운문(雲門)의 초적(草賊) 김사미(金沙彌),
초전(草田)의 초적 효심(孝心) 등을 칠 때, 초적의 재물을 탐낸 권신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이지순이 적과 내통함으로써 관군의 동정이 수시로
누설되어 여러 번 패전했다. 이에 법대로 이지순을 다스리면 그 아버지 이의민의 박해를 받을 것이며, 그대로 두자니 더욱 성할 것이라 개탄하고
기양현(基陽縣:안동)에 내려가 음독 자결했다.
전종도(全宗道) 신라 때 승상(丞相)에 올랐다.
전 진(全 震)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전 총(全 寵) 고려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전충수(全忠秀) 고려 때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전충우(全忠佑)
고려조(高麗朝)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전함정(全咸正) 고려 때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전 협(全 協) 1878(고종15)~1927 독립운동가. 서울 출신. 1898년에 농상공부
주사(農商工部主事)가 되고 제주 군수(濟州郡守)를 거쳐, 일진회 평의장(一進會評議長)·부평 군수(富平郡守) 등을 역임하고 만주로 망명,
서간도(西間島)·상해(上海) 등지로 왕래하며 항일운동을 하다가 1919년 귀국하여 3·1운동에 가담하고,
종교단체·상공단체·부인회·유림회(儒林會) 등 각계 각층을 총망라하여 대동단(大同團)을 조직, 김가진(金嘉鎭)을 총재에 추대,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듬해 김가진을 상해로 탈출시키고, 이어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해로 보내려다 안동현(安東縣)에게
발각되어 서울로 돌아왔으나 체포되어 10년 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중 병보석되었다.